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작은 수도워에 행방불명된 스승을 찾는다는 수도사들이 몰려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스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 수도사가 우연히 밭에서 똥지게를 지고 거름을 나르는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남루해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들의 스승이 분명했습니다. 수도사들은 스승을 모시고 돌아갔지요. 그런데 어느 날 스승은 또다시 수도원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수도원을 탈출한 것일까요? 그가 그토록 수도원을 도망치려고 한 까닭은, 다만 ‘겸손한 삶’을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존경하고 받드는 수도원의 장의 자리에 앉아서는 도무지 겸손한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평생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수도에 전념하는 수도자는 끊임없이 도망치지 않고서는 겸손한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겸손을 향해 도망쳤다는 수도자 피노피우스 이야기입니다.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1:30)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말은 허투루 하는 빈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의 몸에 찌르는 ‘가시’가 있는데, 얼마나 괴롭던지 바울은 세 번이나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기도는 거절당했습니다.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입니까? 병약하고 궁핍한데다 기도의 능력까지 없다니요. 이런 약해빠진 무능한 사도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려고 할까요?
바울은 왜 꼭꼭 숨겨야 할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걸까요? 사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전설적인 능력의 사도였을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당사자로 복음을 심고 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도입니다. 게다가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공적을 남겼지요. 그 모든 것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듣고 보아서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염려합니다. 자신이 받은 엄청난 계시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것을 우려하고 경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자신이 교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7절) 그의 약점은 그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찌르는 가실ㄹ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가시는 떠나지 않았지요.
바울은 그것조차 기도의 거절이 아니라 응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주님께 받은 확실한 응답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고통스러운 거절이 하나님의 확실하고 은혜로운 응답이 됩니다. 주님의 능력은 가장 약한 데서,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