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숙부의 아들 하나멜에게서 아나돗에 있는 그 밭을 사고, 그 값으로 그에게 은 열일곱 세겔을 달아 주었다. 그 때에 나는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그것을 봉인하고, 증인들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었다.
망할 줄 뻔히 알면서도 거기에 투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 어리석은 사람임에 틀림없겠지요? 그런데 신앙인은 때로, 아니 자주 그런 무모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믿음이 아닐까요? 눈앞에 빤히 보이는 것을 누가 굳이 희망이라고 하겠습니까?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언자, 선지자란 미리 보고 앞서 경고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이미 코앞에 닥친 일을 저 혼자만 모르는 듯 행동합니다. 때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입니다. 그때 사촌 하나멜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 땅을 살 권리를 갖는 법에 따라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땅을 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제 나라가 망하고 모두 노예로 잡혀갈 판인데, 땅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예루살렘 외곽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땅, 투자 가치도 없는 땅에 왜 돈을 허비하겠습니까? 더구나 예레미야는 파국을 목이 터져라 경고해 왔습니다.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파멸하여 모두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눈물로 호소해 왔지요.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외치다 못해, 자기 목에 멍에를 쓰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온몸이 촛농처럼 녹도록 외치다가 동족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요. 그에게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그 밭을 사겠습니까? 다시 밟아보지도 못할 땅을 사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이지요. 지금은 오히려 있는 땅이라도 내다 팔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밭을 샀습니다. 은 칠십 세겔 에누리 없이 제값을 다 치리고, 매매계약서를 빈틈없이 꼼꼼이 쓰고, 증인들을 세우고, 친히 서명하여 완벽하게 봉인하는 모든 절차를 빠짐없이 다 챙기며 그 밭을 샀습니다.
아나돗의 밭은 예레미야에게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그것은 희망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아나돗의 밭은 허를 찌르는 고도의 땅 투기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련도, 탐욕스러운 집착도 아닙니다. 아나돗의 밭은 희망하는 믿음,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지금은 비록 절망의 때이지만, 엄청난 파국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비록 예레미야 자신은 눈물과 슬픔과 고통속에서 스러져 버린다고 해도, 그가 그 땅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마침내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되어 바벨론에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희망은 다음세데를 위한 준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