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야의 아내는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 남편을 생각하여 슬피 울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아니 가끔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됩니다. 밧세바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느닷없이 왕에게 끌려가서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왕은 추악한 자기 죄를 감감추려고 전쟁터에 나간 그녀의 남편을 불러들였지요. 그렇지만 남편은 어주에 만취하고서도 아내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것이 문제였지요. 왕은 남편을 선봉에 세우고 가장 전투가 치열할 때 남겨두고 후퇴하라는, 참으로 비열한 밀지를 보냈습니다. 지엄한 어명에 따라 우리야는 장렬하게 전사하고 그녀는 다시 왕궁으로 불려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는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자기 남편을 생각하여 슬피 울었다지요? 지나치듯 짧고 무심한 한 문장에 어떻게 그녀의 슬픔을 다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비열한 다윗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어릴 때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물리쳐서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 후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일 왕국을 세우고 주변 나라들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남북 분단으로 갈등하며 외세에 기웃거리다가 쇠망한 이스라엘에게 ‘다윗왕국’은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의 후손으로와서 다윗의 나라를 재건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에서 예수님에 이르는 기다림의 계보입니다. 이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14대, 그 후 예수님까지 14대입니다. 7의 배수를 써서 하나님의 역사가 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 완벽한 계보의 흐름을 생뚱맞게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방 여인들’입니다. 남자들이 낳고 잇고 다하는 계보에 굳이 여자들이, 그것도 이방 여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 여인들은 그래도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올렸지요. 그런데 밧세바는 자기 이름도 드러내지 못합니다. 마태는 굳이 그녀를 ‘우리아의 아내’라고 적시함으로써 그녀가 겪은 참담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소환하여 다윗의 추악한 죄를 만천하에 다시 폭로합니다. 왜 복음서는 그저 티 없이 순결하고 거룩해야 할 그리스도의 계보를 소개하면서, 아름답고 완벽해야 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그토록 비엻고 추악한 기억을 불러내는 것일까요? 참으로 답답하고 비열하고 추잡한 일들이 벌어지는 오늘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일까요? 도무지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듯한 깜깜한 절망 속에서도, 그럼에도불구하고 파기되지 않고 마침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