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30/다시 시작하다/창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그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사랑해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지요. 둘은 형제였지만, 삶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생활 양식, 즉 문화가 다른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이 드리는 제사도 달랐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입니다. 가인은 곡식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과 그의 제물은 분리되지 않고, 그 방점은 ‘사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보십니다. 화가 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문제는 ‘제물’이 아니라 ‘올바른 일’입니다. 가인이 그때라도 올바르지 못한 일을 멈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가인은 아벨을 꾀어서 들로 나가 아우를 쳐서 죽이고 맙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폭력의 본질은 형제 살해라고 말합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르다고 혐오하고 배타하고 살해하는 끔찍한 죄악의 정체는 가인의 죄악이다 그 말입니다. 자기 혈육을 살해한 가인은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지요. 그 아들이 다시 아들을 낳고, 라멕에까지 이릅니다.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이렇게 소리치며 위협했다지요?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9창 4:23~24) 이는 무한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보복하겠다느 엄포입니다.
어쨌거나 인간의 역사는 가인의 계보로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역사는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인의 계보와는 다른 새로운 계보의 씨앗이 싹트게 됩니다. 아딤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치하였습니다. 여기서 ‘동침하였다’고 번역한 히브리말은 ‘안다’, ‘사랑한다’라는 말입니다.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이 ‘다시’ 사랑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을 ‘허락’이라는 뜻으로 ‘셋’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허락하셨습니다.
형이 동생을 살해한 참담한 상황에서 아담은 ‘다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다른 씨’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셋’이 태어났습니다. 새로은 씨앗이 싹트고, 새로운 계보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는 ‘약속의 계보’입니다(눅 3:38). 다행입니다. 아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기다림의 역사가
‘다시’ 허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