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사건으로 인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는 공회앞에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하는 공회의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전 4:19,20) 하였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는 공회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오히려 더 선명히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도들의 모습이 참으로 당당합니다. 참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알고 구원을 이미 받은 이들은 세상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어떻게 사망의 권세가 깨지는지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너희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을 들을 것인가.....언제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위협하는 일이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을 듣고 예수의 이름에만 순종하며 높이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과 성령을 받은 교회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세나 되었습니다(22절), 그리고 그 사람은 베드로, 요한 두 사도와 함께 공회에 서서 함께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두 사도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 대한 증인으로 공회앞에 있습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다고(16절) 공회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이 말합니다. 전에는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도 이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성전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에게 구걸하던 자가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자였는지 모르나 이제는 당당한 예수의 증인이요 하나님의 구원가 영광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공회앞에서도 당당히 서서 자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 나았음을 알ㄹ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불편하고 위험한 자리에 그가 사도들과 함께 서 있을 이유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공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아마 그가 공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공회원들은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공회원들에게 병나은 이 사람은 불리한 증인이니까요.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난 그 사람, 그리하여 자신이 늘 앉아 구걸함으로 사실은 안으로는 한버도 들어가 보지 못했을 그 성전에 들어가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그 사람은 이제는 사도들과 함께 공회에 서서 예수 이름의 표적이 되고 증인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만이 증인이 아니라 병 나은 이 사람도 증인이 되었고, 이 일로 남자만 오천명이 믿는자가 되었는데(4:4), 이 놀라운 일을 증인으로 함께 목격하고 함께 이룬 것입니다.
증인이 될 때 이 놀라운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증인으로 사도들과 함께 공회에 서고 사도들과 함께 담대히 말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되었습니다. 증인은 함께 서 있는 사람입니다, 함께 담대히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날 이 병자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사도들과 함께 공회에 선 것처럼 저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함께 서서 담대히 예수 이름을 말하며 그 이름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