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사로잡아간 이들인 대제사장들의 수하들과 성전 수비대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심문당하시던 그 밤, 심문과 심문사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며 예수님께 심한 모욕과 폭력을 행하였습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63,64절>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고 그분의 눈을 가리며 선지자 노릇 하라며 그분에게 이와 같은 무수한 폭력을 내리꽂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불의함, 그들의 악함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 선지자라 불리며 혹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송받던 이가 죽을 자리로 잡혀 들어왔는데 바로 그분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능욕하고 때릴 수 있는 권세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악한 모습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긍휼이 없는 마음, 자비가 없는 마음, 자신의 마음과 힘대로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악한 것입니다. 순결하신 예수님 앞에 자신들의 불의와 악한 심성이 드러나자 견딜 수 없던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께 견디기 힘든 불의한 폭력을 무자비하게 쏟아놓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폭력과 희롱, 바로 이것이 불의이며 악한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잘못과 어두움이 드러날 때, 스스로의 말과 행동으로 정당화가 되지 못할 때 하는 일은 결국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휘두르는 말과 무자비한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의 푸틴이 그런 경우입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바로 그와 같고 스스로에게 정당성과 이성적 사고가 결여되는 이들이 나타내는 모든 폭력이 그러합니다. 주님의 방법은 이러한 불의와 희롱과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러한 폭력에 자신을 가만히 내어주심으로써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힘과 폭력의 정의가 아니라 낮아짐과 순종함의 도를 따라 살아갈 것을 보여주십니다. 제자가 따라야 할 것은 힘의 정의가 아닙니다. 비록 그 힘과 폭력 앞에 야만스러운 폭행을 당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침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님의 매 맞음과 모욕당하심과 죽음을 통과하여 세워졌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폭력과 불의 앞에서 다시 한번 주님이 당하신 희롱과 폭력을 기억하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세워지는 봄날을 맞이할 수 있길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