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이 표현의 뜻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애굽 사람들, 바로의 노예로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고대 시대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래서 노예들을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인간이 아닌 짐승이기에 노예는 영혼이 없습니다. 영혼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위한 ‘신’이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의 만신전에는 그래서 노예들의 신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감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시키던지 괴로워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비록 주인이 그를 학대하더라도 감정 없이 다 해내야만 했습니다. 바로가 히브리 노예들 가운데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다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도 노예들은 감정이 없는 존재이기에 자녀를 잃고, 비록 제 손으로 죽이더라도 아무런 죄책이나 슬픔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예들의 하나님이시라고 바로에게, 애굽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바로가 내 백성을 보내서 나를 섬기게 하라(=예배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시하고 계속 마음을 완고하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감히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 듣도 보지 못한 존재 따위가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이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부르시는 것, 그것이 그 시대, 애굽과 온 세상의 문화에서는 자신을 무척이나 낮추는 일이었음에도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정말 큰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왕 바로의 하나님이 아닌, 그의 소유중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이나 바로와 같은 이에게 마음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그 바로 때문에 신음하는, 감정이 있어도 감정을 숨겨야 살 수 있는,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되시길 기뻐하십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은 곧 그들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들과 같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리하여 가장 낮은 자리를 하나님의 자리로 여기시고 동행하십니다. 자신을 이 시대의 히브리인과같이 여기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그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이제 히브리 사람들은 노예가 아닌 자유민이기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합니다. 노예는 그들의 신이 없고, 설령 신이 있더라도 마음껏 살아가며 자신의 신을 섬길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민들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유민의 핵심은 자신의 하나님을 마음껏 자유로이 섬기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자신의 감정에 따라 웃고 울며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자유인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와 사망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유로운 삶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자유하는 백성만이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