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을 때 그들 앞에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다. 제자들이 볼 때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그 모습이 너무 놀랍고 영광스러워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하였다. 그때의 광경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웠으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였을까....아마도 그 영광과 풍경은 산 아래의 일들은 다 잊을 만큼의 황홀하고 흠모할만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광스러움은 곧 지나고 세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 아래, 나머지 제자들이 있는 곳, 주님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곳,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따르며 주로 고백해야 하는 곳으로 다시 내려온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 여기가 좋으니 여기서만 있고 싶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곳일 것이다, 말하는 그 자신이 영광 가운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내게는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말해야 하는 곳이 어디일까? 산꼭대기일까? 영광과 환상을 보는 곳일까?
무엇보다도 주님과 함께 있는 곳이 “주님 여기가 좋습니다” 라고 말하는 곳이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올라가 영광스러운 광경을 본 것은 여느 높은 산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오른 산이다, 주님이 함께 계신 곳이다. 그러므로 제자는 주님이 계시는 곳,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은 어디든지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해야 한다. 두 번째로 그곳은 바로 주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엡 1:23). 교회가 그분의 몸이라면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가 여기가 좋사오니 해야 할 곳은 그분이 친히 세운 교회임이 분명하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멀리하고선 주님의 영광에 함께 할 수 없다, 주님과 가까이 할 수 없다. 교회가 그분의 몸이며 바로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그분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하고 있는가...“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초막 셋을 짓되....”(마17:4)라고 말하며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교회에서 매 순간 있고 싶다고, 가능하다면 더욱 자주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가....코로나 위험으로 인해 교회를 멀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혹시라도 주와 함께 머물고, 주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믿음을 거세게 뒤흔들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위험과 안전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성도는 고백하고 주와 함께 거하길 사모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할 때 가장 안전하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복되기 때문이다. 어려운 때이지만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천국의 제자들이 많이 일어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