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것이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것도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여러차례 밝히신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직전에 시드기야는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를 불러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과연 이 성과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예레미야는 왕이 그 뜻을 듣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이 여러 차례 전해지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묻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만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요,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이 그 사이 변하지는 않았을까?하는 어리석은 기대 때문이겠지요. 네 하나님은 그 뜻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하나님의 선포된 뜻에 대해 겸손히 듣고자 하는, 하나님께 항복하고자 하는 믿음의 자세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뜻을 바꾸시기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 알려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알고자 하기 전에 먼저 그 뜻에 따를 마음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르고자 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도리어 알게 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이런저런 시험과 격정을 겪을 뿐입니다. 시드기야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뜻을 따를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강성한 반 바벨론주의자 신하들 때문에 항복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항복하는 것은 참 속상합니다, 수치스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항복할 때에만 삶이 보전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내 고집을 꺾는 것, 사람들의 강요와 등살에서 오직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늘 하나님께 항복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같이 속에서 항복을 놓고 갈등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기 너무도 분명하고 선명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길이 있습니다. 잘 항복합시다, 항복에도 적당한 기간이 중요합니다, 적절한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항복할 좋은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더 큰 수치를 당합니다. 오늘도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합니다.